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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ies

이민 네 살, 내 마음 돌아보기

동료 J를 따라 2019년 새해부터 다이어리를 사서 매일 짧은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사회생활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부터는 매일 쳇바퀴처럼 반복되는 일상에선 쓸 일기 거리가 없다고 치부하여 손을 놓았던 일기였는데, 1년을 꼬박 사용하고 나서 보니, 하루를 마감하면서 일기를 통해 내 마음을 들여다보고 보다듬을 수 있어서 좋았다. 자기 전에 일기에 그날 들었던 모든 감정을 후련히 털어놓고 자서 그런지 지난 1년동안 꿈자리도 사납지 않고 깊고 평안하게 잘 수 있었던 것 같고. 365개의 짧은 일기 하나하나를 보며 정말 많이 배웠던, 감사한 한 해가 또 지나감을 실감한다. 믿기 어려울만큼 행복한 나날과 조금은 불안했던 날들이 어울어지며 그렇게 1년이 지나갔다. 몸과 마음이 건강한 상태로 이렇게 한 살 더 먹은 이민 일기를 작성할 수 있어서 정말 감사하다.


행복한 이유 적어보기

미국에 오고나서 1년 반이 지날 무렵인 2017년 여름에 취업을 하고, 그 뒤로 행복지수가 최대치를 찍으며 2년 넘게 지속되고 있다. 처음엔 이 행복감이 당황스럽기도 하고, 좋기도 하다가, 인생은 새옹지마라는데 행복지수에 비례한 큰 고통이 그 뒤에 기다리고 있는건 아닐까 무섭기도 하고, 심지어는 다들 힘겹게 살아가는 세상에서 이렇게 행복한 상태로 지내는게 죄책감이 들기까지도 했다. 행복한데 그 행복함을 만끽하지 못하고 이렇게 불안한 상태로는 살 수 없다는 판단이 들어서, 내가 왜 행복함을 느끼게 되었고, 또 왜 불안한 지 그 이유를 파보기로 했다. 하나둘씩 적고보니 정말 많은 요인들이 나의 높은 행복지수에 기여했다. 너무 개인적인 것들이라 아주 세세한 사항들은 일기에만 적어두고 블로그에는 나에 행복 지수에 크게 기인한 세가지의 큰 골자를 공유한다:

1. 가족, 주변의 사람들과 환경
2. 받아들이기

3. 미니멀리스트로 전향

주변 환경은 우리 삶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일단, 가장 큰 틀의 미국 생활은 적어도 내가 자주 이동하는 범위안에서는 ‘우리집’이라는 인식이 강하게 새겨졌다. 세상의 모든 것이 동전의 양면과 같아 미국의 삶이 다 마음에 드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여기서 계속 살 예정이니, 좋든 실든 미국의 규범이나 제도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고 이제는 꽤 적응이 되었다. 가령, 공공기관에 갈 때면 한두시간 웨이팅은 기본이니 책을 잊지 않고 가져가고, 문의 전화를 할 때도 이민 초창기와 달리 더 이상 스트레스 받지 않고 사람이 연결될 때까지 스피커 폰으로 돌려두고 여유롭게 다른 일을 본다(웨이팅이 한시간이 넘는 경우도 허다하다). 생활 반경에 적응을 해서 그런지 환경적으로 스트레스 받는 요인은 없고, 오히려 안정감을 느낀다.

다음으로 중요한 틀인, 사람. 일단 가족부터 얘기하면, 양가로부터 매일 같이 받는 스트레스가 없다. 물리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친정 및 시댁과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기 때문. 짝궁은 더할나위없이 나에게 완벽한 배우자이다. 나의 부족한 부분을 다 채워주고도 모자라, 정말 배울게 많은 사람. 우리의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늘 노력하고, 같이 있으면 나도 덩달아 좋은 사람이 되고 싶게 만드는 사람. 매일 둘이 똘똘 합심하여 서로를 살피고, 공동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힘쓴다. 이이를 만난건 하늘에서 내린 큰 축복인 것 같다.

나의 성향과는 맞다고 생각되진 않지만, 근무중인 회사의 근무 환경도 스트레스 없는 삶에 한 몫을 했다. 무엇보다 우리 회사를 다니면서 가장 좋았던 점은 바로 나를 진심을 다해 믿고 이해해주는 직장 동료들을 만난거다. 내게 친형제처럼 다가와, 성심성의껏 도와주고, 서슴없이 삶의 깊은 얘기를 나누고, 본인들이 가진 것을 아낌없이 나눠 준, 정말 배울 점이 많은 동료들은 내 사회생활을 더 행복하고 풍요롭게 해주었다. 매일 저녁, 다음 날 회사가는게 고대 될 정도로 동료들이랑 사이가 정말 돈독해졌고 출근길 발걸음이 정말 가벼웠다. 이렇게 마음 잘 맞는 또래 동료들을 만나게 될 수 있게 되어 감사하다고 감사기도를 몇번이나 드렸었는지 모른다.

직장 동료 J가 떠나기 전 함께 했던 마지막 브런치, 그날의 따듯함과 웃음들을 잊고 싶지 않다
Fall in Los Angeles, 2019

석정호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님이 어떤 강의에서 “인간관계에서 받은 상처는 좋은 인간관계의 경험을 통해서 치유되고 교정될 수 있습니다. 나를 믿고 이해해주는 사람이 단 한명이라도 있다면, 그 사람은 아무리 힘든 상황에 갔다가도 자기 마음을 회복하고 다시 살아갈 힘을 얻게 됩니다”라고 말씀하셨던 대목이 떠오른다. 마음 잘 맞는 직장동료들을 만나고 나서부터는 신기하게도 과거에 받았던 마음의 상처들이 조금씩 치료되어갔다. 그리고 상처들이 거의 다 아물었을 즈음, 나는 인간관계에 더이상 집착하지 않기로 마음 먹었다. 특히, 내 마음을 불편하게 했던 또는 지금도 불편하게 하는 사람들, 그리고 같이 있으면 부정적인 기운이 넘쳐나는 사람들은 멀리하거나 정리하기로 결심했다. 내가 아무리 좋아했던 사람이라도 상대방이 나와의 관계를 멀리하고자 한다면 나 또한 매달릴 이유가 없음을 받아들이고 나도 move on 할 것. 적어도 인간관계는 서로 함께 가꿔나가야 비로소 좋은 관계로 이어 나갈 수 있으니까. 나에게 마음과 시간을 주는 사람들에게 나의 시간과 에너지를 오롯이 쏟기로 했다. 이렇게 하기에도 우리의 인생은 너무 짧다.

관계에 힘을 쓰느라 늘 애먹었던 나는 그냥 힘을 좀 빼기로 했다. 그리고 그것을 모든 것에 확장시켜 적용해보기로 한다. 그렇게 힘을 빼고 받아들이는 방법을 조금씩 배우기 시작한 나는, 내가 바꾸려고 해도 바꿀 수 있는 부분이 아니거나, 바꾸려고 노력 조차도 하지 않을 거면, 불평하지말고 그냥 적응하기로 했다. 인간관계도, 회사도, 예상치 못한 일도, 모두 다 그대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이런 것도 다 경험이니, 경험할 수 있음에 그저 감사하기로 했다. 불행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을 보는 관점을 조금만 달리하니 이 마저도 경험이고 축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면 – 앞서 언급했던 것들 못지 않게 중요한 행복 요인은 ‘정말 필요한 것만 구입하는 미니멀한 삶’이다. 한 때 정신없이 일에만 몰두하고 스트레스를 소비로 푼 적이 있었다. ‘이걸 사면 행복할 것 같다’라는 생각에 매달 무언가 값비싼 걸 샀었는데, 그러한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매달 새 옷을 사고, 남들이 하는 건 나도 해야할 것 같아 매번 불필요 한 소비를 서슴없이 자행했던 과거의 나는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정말 써야할 곳에만 쓰고, 옷도 안사고, 내 집 장만을 하겠다는 각오로 최대한 안쓰려고 하는데 돈을 주구장창 쓸 때보다 외려 더 큰 행복함을 느낀다. 돈이 나를 컨트롤 하는게 아니라, 내가 돈을 컨트롤 한다는 느낌이 너무 좋다. 내년이면 양가 부모님 도움없이 우리 집을 마련하고, 투자 및 노후준비도 조금씩 시작할 수 있다는 사실에 생각만해도 행복하다.


불안한 이유 적어보기

행복한 이유는 정말 생각하면 할 수록 길게 적을 수 있었다. 파면 팔수록 감사할 거리가 넘치는 인생이다. 하지만 내 안에 잠식한 불안한 이유도 알고 싶었다. 내가 그간 느꼈던 불안은 크게 다음과 같다:

1. 먼 곳에서 노후를 앞둔 부모님을 둔 맏이로서의 책임감
2. 나의 감정보다는 타인의 감정을 더 배려하려는 습관으로 이용당할 것 같은 두려움
3. 마음 바닥에 가라앉아있는, 아직 해결하지 못한 마음 속의 감정 잔재

이렇게 내면의 불안함을 가시화하니, 적는 것만으로도 키를 잡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이내 문제 해결을 해야겠다는 욕구가 솟았다. 그러나 정작 문제는, 무엇이 나를 괴롭히는 지 감은 왔으나 이걸 어떻게 해결 해야할 지, 나의 마음은 어떻게 다스려야할 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던 것. 무엇보다 ‘나’라는 사람이 누구인지 감이 잘 오지 않았다. 나의 마음을 헤아리려면 나에 대해 잘 알아야 하는데, 어떤 모습이 진정한 나인지 알 지 못했던 거다. 그래서 처음으로 인터넷에서 성향, 심리, 관계에 관련한 책들을 사서 읽기 시작했는데, 그렇게 나는 살면서 처음으로 나 자신에 대해 알게 되기 시작했다. 책들을 한두권 읽어가면서 안도의 가슴을 쓸어내기도 하고, 내 얘기를 하는 것 같아 펑펑 울기도 하고, 그렇게 좀 더 객관적으로 내 감정과 마음을 깊게 들여다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꾸준히 내면의 치유와 성장에 정말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될 것 같다는 필요성에 읽고 싶은 책들의 목록을 짜기 시작했다.

매주 화요일 저녁이면, 스페인어 수업시작을 기다리며 학원 앞 공원에서 책을 읽곤 했다.
Summer in Santa Monica, 2019

사실 십대 때 나는 부모님을 위해 산 껍데이였다. 부모 말 잘 듣고 허튼 짓 하지 않는 착한 딸로, 학교 다닐 때는 선생님 말씀 잘 듣고, 꼬박꼬박 숙제도 잘하는 그런 아이 말이다.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나서는 회사를 위해서만 사는 껍데기를 자처했다. 인정받기 위해서 부단하게 노력했다. 내 마음을 전혀 돌보지 않고, 나를 가학하며, 마음의 신호를 애써 외면하며 더 몰아세웠던 것 같다. ‘회사의 성공은 곧 나의 성공, 나의 성공은 곧 회사의 성공’이란 모토로 말이다. 내 마음이 괜찮은 지 또는 힘든지 들여다 보지 않은 채 그저 부모님과 회사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열심히 살았었다. 모셨던 회사중 한 대표님은 입사초기에 이런 내가 우려가 되셨었는지 – 내가 브레이크가 고장나 질주하는 자동차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조언해주셨었는데 (그러면 회사생활을 오래 하지 못한다고), 그 당시 나는 인정받고 싶은 욕구에 눈이 멀어 브레이크를 조절하며 달려야하는 것을 생각할 겨를 조차 없었던 듯하다 (아니면 페이스 조절을 하면서 동시에 인정받는 방법을 몰라 페이스 조절을 포기한 걸 수도). 결국 대표님의 우려대로, 그리고 내 바람과 달리 나는 그곳에서 오래 일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렇게 치열했던 나의 20대를 후회하지는 않는다. 덕분에 배운 것도, 얻은 것도, 잃은 것도 많았던 좋은 경험을 했다. 정말 많이 부딪히며 그렇게 배울 수 있던 기회를 주었던 사람들에게 감사하고 감사하다. 지금의 내가 그 때가 없었으면 없을테니까. 그렇게 사는게 그 때 당시에는 맞는 것 같았고, 지금 다시 그 당시로 돌아간다해도 나는 똑같은 삶을 선택했을 것 같다. 열심히 살았던 나의 과거가 부끄럽지 않고, 자랑스럽다. 무모했던 20대였고, 부양가족도 없으니 내가 원하는 대로 속도를 낼 수 있었던 환경이여서 욕심내면 뭐든 다 가능했던 시기였다. 하지만, 나 스스로에겐 너무 가혹했던 것은 사실이다. 물론 20대 때부터 일도 잘하고 자기관리도 잘하는 사람이었으면 더 좋았겠지만, 30대가 된 지금이라도 내 마음과 건강을 살필 수 있게 되서 너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5가지 사랑의 언어』를 읽으면서는 만약 내가 나의 사랑의 언어인 ‘인정하는 말’을 많이 들으면서 자랐더라면 20대때 그렇게까지 인정받기 위해 회사일에 목메여서 일했을까? 라는 의문이 들기도 했다)

조금 이기적이더라도 이제부터라도 나는 내 인생을 가장 우선시하는 삶을 살아가기로 했다. 그러기 위해선, 우선 누구에게 인정받기 위해 살지 말 것. 누구와도 비교하지 말고, 내 속도에 적응하고 만족할 것. 내 감정에 귀 기울이고, 스스로를 믿고 응원해주고 사랑해줄 것. 내가 행복한 것에 대해 죄책감 느끼지 말 것. 할 수 없는 걸 할 수 있다고 함부로 말하지 말 것. 나를 괴롭히면서까지 다른 사람을 위해서 헌신하지 말 것. 나에게 무례한 사람에게 선대하지 말 것. 안되는 건 안된다고 정중히 말 할 것. 내가 컨트롤 할 수 없는 상황에 스트레스 받지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뭔지에만 집중을 할 것. 현자들이 전하는 삶의 교훈을 책으로 습득하고, 하나둘씩 조금씩 매일 실천하며 노력할 것. 그리고 조금 채워졌다고해서 내가 이미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허영심을 갖지 말고, 배움을 게을리 하지 말 것. 이렇게 나열하기엔 너무 쉽게 써지는 다짐들이지만, 실천하기엔 오랜시간의 노력이 따르겠지. 원래 처음은 쉽지 않은게 당연함을 받아 들이며 평소 생활에 체화될 때까지 조급해 하지 않는 것이 정말 중요할 것 같다.

1년이 지난 지금도 내 안의 불안은 여전히 마음 속 한구석에 자리잡고 있다. 하지만 매일 조금씩 노력하다보면 자존감도 높아지고, 좀 더 단단한 사람이 되어 어떤 일이든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내성을 기를 수 있을거라고 믿는다. 그렇게 연습하다보면 문득 문득 수면위로 떠올라 괴롭히는 과거의 상처들도 시나브로 치유가 될 것 이고, 무차별 공격을 하는 사람들로부터 내 감정도 보호 할 수 있는 대처술도 생기고, 재정적으로 더 탄탄해지고 여유로워지면 부모님 노후까지도 챙겨드릴 수 있겠지. 결국 내 불안은 많이 읽으면서 배우고, 연습하고, 준비하면 어느 정도 다 컨트롤 할 수 있는 부분인 것 같다. 불안이 나를 조정하는게 아니라 내가 불안을 인지하고 조정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도 덜 불안해질 수 있다고 본다.

5번째 해는, 마음껏 행복을 누리는 한 해가 되기를 소망한다.


Featured image courtesy of Sasha Freemind on Unsplash

Ciena About Author

캘리포니아 로스엔젤레스에서 활동하는 블로그 운영자이자 콘텐츠 제작자입니다.